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1993년 러시아 헌정위기 (문단 편집) == 여담 == [youtube(kixJndFg_QI)] 러시아 락밴드 [[데데테]]의 곡 "정의에는 정의로(Правда на правду, 1994)"[* 누구의 편을 든다기보다는 이런 상황이 발생한 비극과 그에 대한 슬픔, 높으신 분들에 대한 비판이 드러나 있는 곡이다. 데데테의 리더 셰프추크는 1980년대부터 반체제, 반정부 음악가로 유명했으며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참가한 러시아 정부를 비판하다가 고소되는 등 활발히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여담으로 소련 붕괴 이후 1994년 니카(Ника) 영화제에 초청받았는데 높으신 분들 앞에서 대놓고 이 곡을 연주해 버려 그 뒤부터는 이런 자리에 초청받지 못했다는 뒷이야기가 있다. 노래가 노래다 보니 스튜디오 버전은 없고 라이브 녹음도 잘 없다. 이 버전이 유명하지만 2017년 모스크바 "История звука"(소리의 역사) 공연에서 한 번 더 연주한 것도 남아 있다.] [youtube(3QKecb16NwQ)] 러시아 락밴드 [[예고르 레토프|그라지단스카야 오보로나]]의 곡 "승리(Победа, 1997)"[* 이 곡을 작곡한 보컬 [[예고르 레토프]]는 [[민족 볼셰비키당]](NBP)의 창당인이 되는 등 90년대 친공산당/공산주의적 행보를 보이다가 90년대 말부터는 정치와 선을 긋는 행보를 보였다. 소련 시절 "반체제적" 가사로 인해 KGB에 체포당하고 정신병원에 강제 입원을 당할 정도로 소련 정부와 충돌을 빚었던 것을 생각하면 모순으로 보이지만 레토프 자신이 생각하는 '소비에트 [[국가주의]]'와 소련 말기 '부패한 정부'는 다르며 자신은 소비에트 국가주의자라고 과거 인터뷰에서 언급한 바 있다. 본인은 헌정위기 당시 가두행진에도 여러 번 나섰는데, 옐친이 본격적으로 탱크로 사람들을 깔아뭉개기 하루 전에 벗어나 살아남았다고 한다. 본인은 자신의 고향인 [[옴스크]]에서 할 일이 있어 모스크바를 떠났다고 하고 형 세르게이 레토프는 행진 중 몇몇 노파에게서 "이 장발 자식아, 여긴 너 같은 놈이 있을 곳이 아니야" 같은 모욕적 언사를 듣고 떠났다고 인터뷰에서 밝힌 바 있다. ~~실제로 당시 레토프의 헤어스타일이 장발이긴 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80년대까지는 한 쪽 머리만 길게 기른 [[모히칸]] 머리를, 90년대 이후에는 조금 더 정돈된 장발로 다녔다~~] [youtube(JPMlmBXne1k)] 러시아 락 아티스트 라디오 타포크(Radio Tapok)의 곡 "검은 10월(Чёрный октябрь)".[* Radio Tapok은 러시아의 락 음악가로, 이전부터 유튜브를 통해 다른 가수들의 곡을 커버해 왔다. 특히 [[사바톤]]의 곡들을 러시아어로 자주 커버했는데, 그의 곡 "Defense of Moscow"를 사바톤이 역으로 커버해 주어 그 덕에 유명해졌다. 다만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에는 러시아 정부의 눈치를 보는 듯 선전에는 딱히 적극적으로 찬동하지도 않으면서 동시에 반전여론을 대놓고 드러내지는 않는 등 이도저도 아닌 듯한 형태로 간간히 활동 중이다. 일단 [[2022년 러시아 동원령]]에는 소집되지 않았고 2023년 공연도 일정이 잡힌 상태이다. 가사의 내용은 역시 '크렘린' vs '최고 소비에트'의 구도를 보이며 각자의 정의와 각자의 권력을 위해, '붓을 들어 역사를 써내려갔고 새로운 정부가 만들어졌으며 [[러시아 국기|푸른 하늘 아래 붉은 피가 흩뿌려진 국회의사당]], 그곳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네!'라는 민감한 내용을 가사로 담았다.] 같은 날인 [[10월 3일]] [[소말리아]]에서는 [[모가디슈 전투]]가 일어났다. [[미국]] [[빌 클린턴|클린턴]] 행정부는 소말리아보다 훨씬 중요한 일인 모스크바 사태에만 주의를 집중하느라 모가디슈 전투에서 고전하는 미군 병력에 대한 지원이 늦었고 [[미군]]은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헌정위기의 주도자 중 한명인 루슬란 하스불라토프는 옐친과 전혀 반대되는 주장의 회고록을 나중에 발간하였다. 하스불라토프는 [[소련 공산당]]의 당원이었지만 [[1991년]]부터 무소속이었는데 [[그로즈니]] 출신 [[체첸인]]이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옐친이 [[체첸]] 분리주의자 [[조하르 두다예프]]를 지원하여 체첸을 화약고로 만들어 버렸고 이 과정에서 불법적인 [[인신매매]], 무기 밀수와 [[돈세탁]]으로 큰 이익을 얻었다고 한다. [[1993년]]쯤 되면 여러 유력 정치인들이 이 사실을 눈치챘고 최고회의에서도 조사를 통해 결론을 내리고 옐친을 [[탄핵]]하려 했다는 것이다. 얼마나 사실인지는 걸러들어야 하겠지만[* 옐친 탄핵 시도 당시 러시아 소비에트에서 공산당과 극우정당이 마구 준동한 것은 엄연한 사실이고 하스불라토프가 전 공산당원이었던 것과 루츠코이 부통령이 러시아 공산당원이었던 것 또한 엄연한 사실이다. [[러시아 연방 공산당]]은 절대로 민주정당이 아니다. [[전연방공산당]]의 실질적인 후신 조직이니만큼 그 시절로 돌아가자는 작자들이 민주적일 수가 없다.] 실제로 하스불라토프는 체첸인 중에선 [[1991년]] 당시 가장 높은 직위를 역임하고 있었고 두다예프의 유력한 경쟁자였다. 본래 하스불라토프는 체첸의 자치운동 자체에는 반대하지 않아서 [[체첸-인구시 공화국]] 최고 소비에트(최고회의)의 해산과 새로운 정부기관의 설립을 체첸인이자 러시아 소비에트 의장으로써 직접 감독하고 집행했는데 두다예프가 이끌던 체첸민족대회 집행위원회([[이치케리야 체첸]]의 초기 임시정부)가 독자적인 선거를 열어 두다예프를 체첸 대통령으로 당선시켰고 러시아 소비에트에서는 이를 말도 안되는 [[부정선거]]라 일축하였다. 결국 하스불라토프가 실각해 체포되었고 실제로 헌정위기 1년 뒤에 [[체첸 전쟁]]이 일어났다. 하스불라토프는 야인이 되어서도 전쟁터가 된 체첸에 찾아가 양측 모두의 무조건적인 전투 중지와 즉각 휴전 등을 주장하고 평화를 주장하는 라디오 방송을 내보냈다. 러시아 연방을 지지하는 하스불라토프를 좋아하는 체첸인들은 당시에는 많이 없어서 이는 그리 효과를 보지 못했다. 다른 사람들은 체첸 사태와 러시아 헌정 위기를 묶어서 체첸에서의 하스불라토프의 지지도를 깎아먹어 궁극적으로 러시아 소비에트를 파괴하고 [[대통령제]] 국가를 만들려는 공작으로 옐친이 두다예프를 지원하였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것 또한 얼마나 사실인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1995년 옐친의 권력이 확실히 다져진 뒤에는 하스불라토프가 러시아와 체첸의 협상을 중재하겠다고 해도 러시아에서 거절해 버리는 일이 있었다. 만약에라도 휴전이 성사되면 옐친의 입장에서는 과거의 경쟁자가 돌아오는 것이었기에 질색했을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